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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mbrandt_Harmenszoon_van_Rijn.jpg (157.3 KB)   Download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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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 제2주간 토요일 강론/ 요한 6,16-21

그림 / 렘브란트, ‘갈릴래아 호수 풍랑 속의 그리스도(Christ in the Storm on the Sea of Galilee’,1633

<부활 제2주간 토요일 강론, 요한 6,16-21>

독서에 나오는 일곱 명의 부제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살펴보기로 하고
오늘 복음 말씀을 같이 살펴보겠습니다.

삼대 구경거리가 있습니다. 물 구경, 불 구경,  싸움 구경… 당하는 사람은 죽을 맛이겠지만  
보는 사람은 나이노소를 막론하는 것 같습니다.
작년만 해도 비가 많이 와서 팔당댐을 방류하면 근처에 차가 하도 많이 와서 경찰이 교통정리를 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댐 근처에서 가까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차를 대니 길을 막는 일이 생겨요.
도도한 물결이 엄청나 근처에 가면 소리가 안 들릴 정도이고 며칠간 방류를 하면 한강 수위가 1미터 이상 올라가게 됩니다. 나중에 한강변을 걷게 되면 교각 밑에 물 자국이 나서 그만큼 물이 올라갔구나, 합니다. 평면적으로 생각하면 어마어마하게 비가 왔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물은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루 만해도 물이 없다면 살 수 없지요. 밥을 일주일 굶어도 살 수 있지만 물은 삼일이상 먹지 못하면 살 수 없다고 합니다.
예레미야서 2장 13절을 보면 하느님 당신을 생수의 원천에 비유합니다. 인간에 있어서 물이 절실히 필요한데 그 물을 주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시다 라는 이야기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가 13절에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생수의 원천인 나를 버려두고 너희는 떠나가서 물이 고이지도 않는 갈라진 저수 동굴을 판다는 비유를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의탁해야 하는데 정작 쓸데없는, 물도 나지 않는 갈라져서 물이 빠지는 저수동굴을 판다는 표현입니다. 예레미야 47장 2절을 보면 물이 불어나 넘쳐흐르는 강물이 되어 강물이 땅과 그 위의 모든 것 성읍과 백성을 휩쓸어 버린다는 표현이 있는데, 이처럼 인간에게 꼭 필요한 물이고 없으면 죽지만 그 물이 또 노도(怒濤 무섭게 밀려오는 큰 파도)처럼 우리를 휩쓸고 갈 수 있는 무서운 존재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은 풍랑을 만난 제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이는 다른 복음에서는 독립된 사건으로 볼 수 있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앞뒤 문맥 사이에 낀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빵의 기적이 차지하는 비중이 굉장히 큽니다. 아마 신약성경에서 절이 가장 많은 것을 찾으면 요한복음 6장일 겁니다. 6장에 칠십 일절까지 이어지는 데 빵의 기적을 일으키신 다음에 빵의 이야기 하는 사이에 풍랑을 만난 제자들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빵의 기적이 가진 의미를 알아듣느냐 못 알아듣느냐의 긴 말씀을 하시고 요한복음 6장 66절에 보면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몰라서 이야기의 대상인 많은 군중이 떠나갔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처럼 빵의 기적의 의미를 알아듣느냐 못 알아듣느냐는 예수님의 제자 됨에 있어서 시거석이다라는 입장을 취하는 것이 요한복음의 이야기입니다. 사이에 풍랑을 만난 제자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결론부분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바티칸 대성전에 가면 정문에 서서 광장 쪽으로 뒤를 돌아보면 회랑 벽면에 풍랑을 만난 제자들의 그림이 있습니다. 그 그림을 보면서 베드로 성당이 뜻하는 교회는 이처럼 세상이라는 바다 위에 떠있는 배와 같아서 언제든 풍랑을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상징적으로 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 풍랑을 만나겠지만 풍랑을 잠재우고 교회를 살리시는 분은 주님이시다는 이야기를 그림이 상징해주지 않는가 합니다.

렘브란트의 그림 중에 ‘갈릴래아 호수에서 풍랑을 만나신 예수님’이란 제목의 그림이 있습니다. 렘브란트는 빛의 화가로 빛과 어둠을 대비시키는데 초기와 후기의 작품에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빛은 어둠을 대비해서 빛을 이야기합니다. 후기로 갈수록 어둠 속에 담긴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렘브란트의 이 그림에서도 밧줄은 끊어지고 배는 기울어지고 파도는 배를 덮치고 있습니다. 끊어진 줄을 붙잡으려는 사람, 돛이 떨어져나가지 못하게 붙잡고 있는 사람, 배의 기둥을 붙잡고 떨어져 나가지 않으려는 사람, 파도에 떠밀려 가는 사람은 밝은 색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반면에 어둡게 칠해져 있는 쪽에 예수님이 계시고 그 주위에 둘러선 제자들이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은 파도가 걱정이 되는 지 파도가 치는 쪽을 바라보기도 하고 노를 붙잡고 있으면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도 있고, 배 멀미로 배 바깥에 얼굴을 내미는 사람도 있고 예수님을 붙잡고 있는 제자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야기로 잘 알 수 없는 것이 그림을 보면 생생하게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풍랑을 만났다고 하면 상상 속에서 생사가 갈리게 되는 위험한 상황 속에 놓이게 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다, 안심하여라.” 하고 나타나십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풍랑이 잦아들었다 하지 않고, 예수님을 모셔드리려고 하는데 배가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닿았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요한복음에서는 풍랑이란 주제보다 예수님을 모시는 것,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나다.”라는 표현은 희랍어로 ‘ego eimi, 에고 에이미’로, 탈출기에서 모세가 떨기나무 앞에서 야훼께 ‘당신은 누구십니까. 히브리 사람들이 당신의 이름을 물을 텐데 무엇이라고 대답 해야겠습니까’라고 여쭈었을 때 “나는 있는 나다.” 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신적 계시의 표현인데, 여기에서도 ‘나다’라는 것은 단순히 내가 있다는 것보다 예수님의 신원성(神原性)을 드러내는 것이고 예수님과 함께 있음으로써 제자들은 그들이 겪었던 풍랑을 해결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돌아가 볼 것은 예수님께서 군중을 뒤로 하고 산으로 물러나셨다는 표현은 사람들이 혹시라도 빵의 기적을 잘못 해석해서 당신을 왕으로 모시려는 것을 피하기 위해 물러나신 상황이었고, 제자들은 예수님이 함께 계시지 않음을 깨닫고 예수님께 갔지만 심리적으로는 그곳에 더 머물고 싶은 것이 훨씬 컸다는 것을 요한복음은 말하고 있습니다.
즉 많은 군중이 놀라운 현상을 붙잡고 기계적으로 재현하고 싶은데, 그런 일이 일어나면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그런 분이라면 로마와의 관계에서도 우리를 해방시켜주실 희망이신 분이라는 열광 속에 제자들도 일부분 머물고 싶은데 예수님이 계시지 않아 찾아 나설 수밖에 없는 처지와 예수님이 안 계심으로 해서 풍랑을 겪게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거리에 대한 두 가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이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쯤 저어갔을 때라는 것과 어느새 그곳에 가닿았다는 물리적인 거리가 나옵니다. ‘스타디온stadion’은 그리스말로 로마와 그리스의 거리의 한 척도입니다. 예로 우리가 한 자라고 하면 자 한 자의 길이 30센티미터를 말하는 것처럼 한 스타디온은 마차 경기를 할 때 한 경기장의 거리로 185미터에서 190미터가 됩니다. 여기 복음에서의 제자들이 가려던 거리는 4.7킬로미터에서 길게 보면 5.6킬로미터로 대략 여기서 서울대학교 정문까지의 거리가 됩니다. 그런데 요한이 이렇게 자세히 거리를 이야기 했는데 막상 예수님께서 오시자 배는 제자들이 가려던 곳에 어느새 가닿았다는 것을 말함으로써 물리적 거리를 무색하게 합니다. 이 이야기는 어쩌면 예수님이 배에 오름으로써 신비적으로 기적적으로 가닿을 수 있었고, 한편 예수님이 함께 계심으로써 제자들은 풍랑이라는 상황의 두려움과 공포에서 해방되어서 실제 현실을 인식하게 되었고 배가 육지에서 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도 동시에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마 신화적 시대에 살았던 요한복음의 독자들은 이 이야기를 기적이나 신비로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신비나 기적보다 인간적이고 심리적인 측면에서 이해하고 싶은 기대가 더 큽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오늘의 복음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가 더욱 분명하지 않은가 합니다.

우리의 공포와 두려움은 실제적인 상황을 왜곡하거나 잘못 이해하게 합니다. 예수님이 계심으로써 그 공포나 두려움에서 자유로워짐으로써 실제로 주님과 함께 함으로 이겨내는 내적인 힘이 생긴다면 그것도 극복할 수 있는 것처럼, 제자들 역시 예수님과 함께 함으로 기적의 의미를 자신의 삶에서 이루어낸다는 이야기를 오늘 요한복음에서 볼 수 있습니다.
군중은 예수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안 보이자 건너편에서 배를 저어 예수님께 옵니다. 이어지는 이야기가 빵에 대한 기적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부활시기에 내내 듣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부활절 기간 동안 묵상해야 할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중에 풍랑을 만난 제자들의 이야기를 요한복음은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2021. 4. 17. 토
채록, 류정호 테레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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