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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활 제4주일. 성소주일 강론/요한 10,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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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4주일. 성소주일 강론/요한 10,11-18

신앙이란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고 거기에 응답해서 사는 것이 신앙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누구는 성경이 뭐냐고 합니다.
성경은 인간을 찾는 하느님의 이야기와 하느님을 찾는 인간들의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고 하고, 하느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인간이 하느님의 말씀에 응답하는 이야기가 성경에 씌어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거기에 응답하는 삶, 나의 성경을 쓰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 아닌가 합니다.

1869년 늦은 여름, 러시아의 대문호 레오 톨스토이(Leo Tolstoy 1828-1910)에게 일생의 향방을 뒤바꿔 놓는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당시 톨스토이는 7년간의 긴 시간에 걸쳐서 《전쟁과 평화》를 집필하고 이제 막 탈고를 하고 지친 심신을 식힐 겸 새로 장만한 여름별장을 볼 겸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때는 톨스토이가 가장 원기 왕성한 때였고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를 두었고 유명세도 타고 돈도 벌고 있었습니다. 여행을 떠난 지 사흘쯤 되었을 때 모스크바에서 서쪽으로 400킬로미터 떨어진 아르자마스라는 낯선 작은 마을에 도착해서 여행 중 피곤한 몸을 그곳에 머무르면서 하룻밤을 지내게 됩니다. 여관에 방을 얻어 저녁을 먹고 침대에 들어가 깊은 잠에 곯아떨어지게 됩니다.
새벽 두 시경 그는 갑자기 잠에서 깨어나 스스로 이해할 수도, 제어할 수도 없는 큰 공포에 떨게 됩니다. 어둠 속을 응시한 채 질식할 것 같은 알 수 없는 공포 속에 떨고 있는데, “나를 두려워하는 거냐. 내가 여기에 있다”라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한참 후에 톨스토이는 이때의 경험을 말합니다. “차가운 전율이 내 피부 위에 감돌았다. 그래, 이게 죽음이구나. 나와 상관없이 보여도 언제고 올 테고, 아니! 그 죽음이 이미 와 있구나. 살고자 하는 내 모든 존재의 욕구와 죽음이 내게 미친 영향력이 내 눈앞에 현실로 다가왔구나.” 하는 회상을 했습니다. 당시 그는 신앙심이 그다지 돈독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침대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고 성호를 그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아는 기도문을 기억하려고 해도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고 주님의 기도를 바치려고 할 때 그 죽음이 자신에게 다가와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깊은 절망과 두려움, 공포감이 자신을 허무의 나락으로 잡아끄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자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새벽 날이 밝자 톨스토이는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됩니다. 토지를 매입하려던 것도 뒤로 한 채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 후 41년 동안 톨스토이는 더 살았지만 이때의 체험을 잊지 못합니다. 그의 고백록에서 죽음이 다가오는 것이 자신에게 있어 길고 힘든 묵상의 주제였다고 말합니다. 그의 부인 소냐는 톨스토이가 마치 뇌를 다친 사람 같기도 하고 그의 내면에서 고통스러운 과정이 진행되고 있는 것같이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막심 고리키(Maxim Gorky, 1968-1936 러시아 작가)는 이를 ‘아르자마스의 공포’라고 불렀습니다.
이 사건을 체험한 톨스토이는 인생의 근본문제를 고민하면서 성경책을 깊이 묵상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인생의 목적은 선(善)을 행하는 것이며 따라서 현실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믿고 살았습니다. 도스토옙스키(Dostoevskii 1821-1881 러시아 작가, 《죄와 벌》)와 달리 톨스토이는 귀족이었습니다. 장원도 있고 집에 노예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톨스토이는 나중에 자신의 땅을 노예들에게 나눠주고 노예들과 같이 일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의 작품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에게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시다’, ‘바보 이반’, ‘빛이 있는 동안 빛 속에서 걸어라’, ‘하느님은 진실을 알지만 기다리신다’, ‘회개 하는 죄인’, ‘있는 자들의 한가한 대화’, ‘삶이란 무엇인가’,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등등 그 제목만 봐도 그가 지향하고 그리는 세계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아자르마스의 체험’이후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깊이 깨닫고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우리는 톨스토이가 아니더라도 하느님의 부르심에 의해서 삶이 뒤바뀐 무수한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모세가 그랬고, 엘리야가 그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그랬고, 바오로도 그랬고 안토니오 성인도 프란치스코 성인도 그렇고,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님도 그렇고 오늘도 무수한 사람들이 이 부르심을 듣고 응답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성소주일, 착한 목자의 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이 주님의 부르심에 귀 기울이고 들어서 그것이 사소한 이야기가 아니라 나에게 있어 꼭 필요한 일임을 깨닫고 거기에 응답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신앙일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르심은 어떤 면에 있어 우리 인생에 있어서 우리 삶을 완전히 뒤바꿔놓는 새로운 삶으로 바꾸어주는 변모케 하는 그러한 부르심이기도 합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 우연한 결과가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 창조되었고 그래서 우리 인생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고 또 믿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들으셨습니까.
또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고 여러분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 하느님의 부르심이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삶을 새롭게 바꾸어 놓았습니까.
하느님의 부르심은 우리가 해야 할 길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깨우쳐주시고 그렇게 삶으로써 그것이 우리에게 축복이 되는 그러한 부르심을 우리에게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의 진아(眞我), 참된 나가 지금의 나에게 무엇이라고 할까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도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되어야 하는 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나를 바라보시면서 우리를 끊임없이 부르셔서 거듭 태어난 삶, 새로워진 삶을 살도록 초대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생명이고 은총이 되는 삶일 것입니다.
오늘 착한 목자의 주일, 성소주일을 맞아서 주님의 부르심을 귀 기울여 듣고 거기에 응답하는 우리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2021. 4. 25. 부활 제4주일
채록, 류정호 테레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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